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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축제
제목 의인 고 이 수현 15주기 날짜 2016.02.04 09:33
글쓴이 운영자 조회 801
義人 이수현을 되살린 또 다른 의인들의 15년

일본의 한류는 고 이 수현으로 부터---

1월26일은 義人 이수현 15주기… 일본인 취객 구하려다 숨져?

?

사고 후 모금액 행방 알 수 없어… 15년째 '이수현재단' 설립 추진만

그래도 기억하는 이들이 있으니…

?

지난 1월 26일이 무슨 날인지를 기억하는 한국인은 많지 않을 것이다.

국내 몇몇 언론이 그날을 추모하는 짧은 기사나마 보도한 것을 확인한 뒤 안도했다.

15년 전 그날 오후 7시 15분 일본 도쿄 신오쿠보(新大久保)역에서

한 취객(醉客)이 선로로 떨어졌다.열차가 진입하는데 몸을 날린 두 남자가 있었다.

아카몬카이 일본어학교에 다니던 고려대 학생 이수현(李秀賢)과

사진가 세키네 시로(關根史郞)였다.

취객을 구하려고 뛰어든 둘은 현장에서 즉사했다.

일본인들은 그 사건 이후 한국을 다시 바라봤다고 한다.

?

"이수현의 희생이 한류 붐의 뿌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일본인들이 그때까지 무관심했던 태도를 버리고

한국인과 한국 문화를 다시 돌아보게 됐습니다."

이수현 추모영화 '너를 잊지 않을 거야'를 만든 감독 하나도 준지(花堂純次)가 한 말이다..

2016020400405_1.jpg

고 이수현씨. /조선일보 DB

?고 이수현씨 파노라마 "집에 온 내 딸은 한없이 울었습니다.

?귀가하는 길에 사고 현장을 목격한 딸은 두고두고 이수현씨의 의로운 행동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나도 딸의 손을 부여잡고 한없이 눈물 흘렸습니다."

이 말을 한 사람은 다나카 마키코(田中眞紀子) 전 일본 외상이다.

?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영원할 것 같았던 일본의 이수현 붐은 1년 만에 식었다.

"일본인들이란…"이라고 탓하지 말길 바란다. 한국에서의 3주기 추모식도 무산될 뻔했다.

'이래선 안 된다' 싶어 그해 '의인(義人) 이수현재단 설립위원회'를 만든 이가 있다.

?

포철에서 기능공으로 9년을 일했던 노치환(54·코리아재팬 타임즈 서울지국장)이다.

그의 열정에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 조석래 효성 회장, 김상하 삼양사 회장이 9

000만원을 냈고, 명창 안숙선, 소리꾼 장사익, 무용가 석예빈 등이 재능을 기부했다.

?

그 후 다시 이수현은 잊혔고 2006년 부산에서 열릴 추모행사는 흐지부지될 판이었다.

노치환은 풍차를 향해 달려드는 돈키호테 같은 심정으로 부산시청을 찾았다.

"당시 부산시장을 보좌하던 특보 중 한 분을 찾았습니다.

그 초라한 사무실을 보고 놀랐어요.".

2016020400405_2.jpg

?/이철원 기자

?

세 평 남짓 공간에 책상 하나뿐인 공간에서 특보가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뭘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이수현이라는 이름을 꺼내자 그는 "걱정하지 말고 행사를 알차게 준비하시라"고 약속했다.

그의 장담과 달리 부산시에서는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고 한다.

?

다음은 노치환의 기억이다. "부산시 실·국·과장 모두 지원에 반대했어요.

참담한 심정으로 회의를 지켜보는데 그가 벌떡 일어나더니 외쳤습니다.

'이수현을 부산이 기리지 않으면 누구더러 기리게 한다는 말입니까?'

회의장이 찬물 끼얹은 것처럼 됐지요."

?

이 한마디에 반대 의견은 자취를 감췄다. 거의 모든 과(課)가

100만~200만원씩의 자투리 예산을 갹출해 겨우 2000만원의 지원금을 모았다.

돈은 마련됐지만 다 끝난 것은 아니었다.

행사 당일 의인 이수현재단 설립위원장이 불참을 통보한 것이었다.

?

당시 부산시장은 다시 특보를 불러 옆에서 지켜보기 민망할 만큼 질책했다고 한다.

"애초 실·국장들이 반대할 때 접었어야지, 무슨 일을 이따위로 만들어. 위원장도 안 온다는데

내가 시민 몇 명 앉혀놓은 자리에 추모사를 하러 가야 해?"

?

사내는 얼굴을 붉히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시장님, 그래도 가셔야 합니다.

시민과의 약속입니다."

텅 빈 자리가 될 것이라고 걱정했던 것과 달리 부산 초읍동 부산학생문화회관이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걸 보고서야 비로소 시장의 표정이 풀렸다고 한다.

?

이 특보는 그 후로도 이수현을 잊지 않았다. 작년 1월 부산영락공원에서 열린

14주기 추모식에서 그는 부산의 상징 C1 소주를 이수현에게 바친 뒤 무릎 꿇고 절했다.

부르지도 않았고 무직(無職)이던 그의 출현에 오히려 이수현의 부모가 놀랐다.

?

노치환으로부터 기나긴 사연을 들으며 하늘에 있는 이수현이

결코 외롭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죽음은 또 다른 의인을 낳는 씨앗이 됐고 '의사상자 예우법'이 제정됐다.

국립현충원에 '의사상자 묘역'까지 만들어졌다.

?

이수현이 섭섭지 않을지는 장담 못하겠다.

15년이 지났는데 '의인 이수현재단 설립위원회'라는 명칭으로 남아 있는 것도 민망하다.

사고 직후 많은 돈이 모금됐는데 어디 갔는지 알 수 없다.

이대로라면 영원히 '설립위원회'라는 꼬리표가 남을지도 모를 일이다.

?

의인이 또 다른 의인을 낳는 15년을 돌아보며 고심 끝에

앞서 소개한 이 특보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신원이 공개되는 순간 '이수현의 15년'을 되짚어보자는 취지 대신

지금 정부에서 일하는 그를 향해 엉뚱한 독설이 난무할 것 같아서다..

?

?

문 갑식

義人 이수현을 되살린 또 다른 의인들의 15년 이런 사람이 산타

2016.02.04. 09:27 수정 삭제

복사 http://blog.naver.com/chnam71/220617989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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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한류는 고 이 수현으로 부터---

1월26일은 義人 이수현 15주기… 일본인 취객 구하려다 숨져?

?

사고 후 모금액 행방 알 수 없어… 15년째 '이수현재단' 설립 추진만

그래도 기억하는 이들이 있으니…

?

지난 1월 26일이 무슨 날인지를 기억하는 한국인은 많지 않을 것이다.

국내 몇몇 언론이 그날을 추모하는 짧은 기사나마 보도한 것을 확인한 뒤 안도했다.

15년 전 그날 오후 7시 15분 일본 도쿄 신오쿠보(新大久保)역에서

한 취객(醉客)이 선로로 떨어졌다.열차가 진입하는데 몸을 날린 두 남자가 있었다.

아카몬카이 일본어학교에 다니던 고려대 학생 이수현(李秀賢)과

사진가 세키네 시로(關根史郞)였다.

취객을 구하려고 뛰어든 둘은 현장에서 즉사했다.

일본인들은 그 사건 이후 한국을 다시 바라봤다고 한다.

?

"이수현의 희생이 한류 붐의 뿌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일본인들이 그때까지 무관심했던 태도를 버리고

한국인과 한국 문화를 다시 돌아보게 됐습니다."

이수현 추모영화 '너를 잊지 않을 거야'를 만든 감독 하나도 준지(花堂純次)가 한 말이다..



고 이수현씨. /조선일보 DB

?고 이수현씨 파노라마 "집에 온 내 딸은 한없이 울었습니다.

?

귀가하는 길에 사고 현장을 목격한 딸은 두고두고 이수현씨의 의로운 행동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나도 딸의 손을 부여잡고 한없이 눈물 흘렸습니다."

이 말을 한 사람은 다나카 마키코(田中眞紀子) 전 일본 외상이다.

?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영원할 것 같았던 일본의 이수현 붐은 1년 만에 식었다.

"일본인들이란…"이라고 탓하지 말길 바란다. 한국에서의 3주기 추모식도 무산될 뻔했다.

'이래선 안 된다' 싶어 그해 '의인(義人) 이수현재단 설립위원회'를 만든 이가 있다.

?

포철에서 기능공으로 9년을 일했던 노치환(54·코리아재팬 타임즈 서울지국장)이다.

그의 열정에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 조석래 효성 회장, 김상하 삼양사 회장이 9

000만원을 냈고, 명창 안숙선, 소리꾼 장사익, 무용가 석예빈 등이 재능을 기부했다.

?

그 후 다시 이수현은 잊혔고 2006년 부산에서 열릴 추모행사는 흐지부지될 판이었다.

노치환은 풍차를 향해 달려드는 돈키호테 같은 심정으로 부산시청을 찾았다.

"당시 부산시장을 보좌하던 특보 중 한 분을 찾았습니다.

그 초라한 사무실을 보고 놀랐어요.".

?

/이철원 기자

?

세 평 남짓 공간에 책상 하나뿐인 공간에서 특보가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뭘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이수현이라는 이름을 꺼내자 그는 "걱정하지 말고 행사를 알차게 준비하시라"고 약속했다.

그의 장담과 달리 부산시에서는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고 한다.

?

다음은 노치환의 기억이다. "부산시 실·국·과장 모두 지원에 반대했어요.

참담한 심정으로 회의를 지켜보는데 그가 벌떡 일어나더니 외쳤습니다.

'이수현을 부산이 기리지 않으면 누구더러 기리게 한다는 말입니까?'

회의장이 찬물 끼얹은 것처럼 됐지요."

?

이 한마디에 반대 의견은 자취를 감췄다. 거의 모든 과(課)가

100만~200만원씩의 자투리 예산을 갹출해 겨우 2000만원의 지원금을 모았다.

돈은 마련됐지만 다 끝난 것은 아니었다.

행사 당일 의인 이수현재단 설립위원장이 불참을 통보한 것이었다.

?

당시 부산시장은 다시 특보를 불러 옆에서 지켜보기 민망할 만큼 질책했다고 한다.

"애초 실·국장들이 반대할 때 접었어야지, 무슨 일을 이따위로 만들어. 위원장도 안 온다는데

내가 시민 몇 명 앉혀놓은 자리에 추모사를 하러 가야 해?"

?

사내는 얼굴을 붉히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시장님, 그래도 가셔야 합니다.

시민과의 약속입니다."

텅 빈 자리가 될 것이라고 걱정했던 것과 달리 부산 초읍동 부산학생문화회관이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걸 보고서야 비로소 시장의 표정이 풀렸다고 한다.

?

이 특보는 그 후로도 이수현을 잊지 않았다. 작년 1월 부산영락공원에서 열린

14주기 추모식에서 그는 부산의 상징 C1 소주를 이수현에게 바친 뒤 무릎 꿇고 절했다.

부르지도 않았고 무직(無職)이던 그의 출현에 오히려 이수현의 부모가 놀랐다.

?

노치환으로부터 기나긴 사연을 들으며 하늘에 있는 이수현이

결코 외롭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죽음은 또 다른 의인을 낳는 씨앗이 됐고 '의사상자 예우법'이 제정됐다.

국립현충원에 '의사상자 묘역'까지 만들어졌다.

?

이수현이 섭섭지 않을지는 장담 못하겠다.

15년이 지났는데 '의인 이수현재단 설립위원회'라는 명칭으로 남아 있는 것도 민망하다.

사고 직후 많은 돈이 모금됐는데 어디 갔는지 알 수 없다.

이대로라면 영원히 '설립위원회'라는 꼬리표가 남을지도 모를 일이다.

?

의인이 또 다른 의인을 낳는 15년을 돌아보며 고심 끝에

앞서 소개한 이 특보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신원이 공개되는 순간 '이수현의 15년'을 되짚어보자는 취지 대신

지금 정부에서 일하는 그를 향해 엉뚱한 독설이 난무할 것 같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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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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