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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축제
제목 바보의사 박용건 성가복지병원 내과 과장 날짜 2014.05.17 11:38
글쓴이 남철희 조회 1182
바보의사 박용건 성가복지병원 내과 과장 이런 사람이 산타

2014/03/29 19:28 수정 삭제

복사 http://blog.naver.com/chnam71/30187885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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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의 잘나가던 개업,

낮은 데로 병원 더 키우려고 인테리어 공사시간 남는 김에 복지병원 봉사 갔죠

얼마 후, 남아달라는 요청고민

아내의 한마디가 나를 바꿨다"돈 벌 것, 다 벌고 하면 무슨 봉사냐

젊고 힘 있을 때 남 돕는 게 진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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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봄 어느 날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 서울 청량리 동산병원 응급실에 한 살배기 아기 환자가 도착했다.

아기를 품에 안고 뛰어온 엄마는 "아이가 자꾸 숨이 멎어요. 살려주세요"라고 울먹였다.

이 병원 소아과 과장은 이제 막 수련의 생활을 시작한 인턴을 돌아봤다.

"박 선생이 좀 봐줘야겠어. 환자 옆에서 지키고 있다가 숨이 멎으면 입으로 공기를 불어넣어 주는 거야.

"그는 침상 옆에 의자를 놓고 앉아 아기 환자를 지켰다.

언제 숨이 멎을지 모르는 아기.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경험도 지식도 부족한 인턴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저 아기가 호흡을 멈출 때마다 입으로 숨을 불어넣어 줄 뿐이었다.

그렇게 몇 번이나 했을까. 어느새 밤이 지나고 동이 텄다. 꼬마는 새근새근 잠이 들어 있었다.

소아과장이 아침에 출근해 응급실에 들어서자 함께 밤을 지새운 아기 엄마가 벌떡 일어서서 말했다.

"이 선생님이 우리 아이를 19번이나 살렸어요. 내 아기를."그제야 깨달았다.

아기는 밤새 19번이나 숨이 멎는 고비를 넘겼다는 사실을.

이후 그 증세는 사라졌고 아기는 건강하게 퇴원했다.며칠 후 소아과장이 그를 방으로 불렀다.

"오늘 그 꼬마 환자 엄마가 다녀갔네. 요구르트 두 병을 주고 갔어. 하나는 박 선생 것, 하나는 내 것."과장이 요구르트 한 병을 내밀었다.

어쩐지 가난해 보였던 아기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제 막 의사의 길에 들어선 젊은 의사는 그때 깨달았다고 한다.

"세상엔 원인이 밝혀지지 않는 병들이 많다. 의사가 모든 걸 다 고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의사로서 충분한 실력과 자질을 갖추지 못했더라도 환자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많다는 것을 그날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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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건 성가복지병원 내과 과장은 지난 2000년 말 서울 강남에서 운영하던 개인 병원을 접고,

수입이 10분의 1 수준인 지금의 병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내가 가졌던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없다. 이 길이 내 길이란 걸 의심해본 적도 없다고 했다. /허영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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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37년 후 그에 관한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박용건(66) 성가복지병원 내과 과장이

최근 '30회 보령의료봉사상' 대상을 받았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한 해 1만명 이상, 많게는 2만명이 넘는 노숙인과 알코올중독자를 치료해온 '노숙인의 주치의'였다.

지난해엔 '1회 이원길 가톨릭 인본주의상'도 받았다.

지난 24일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에 있는 병원에서 그를 만났다.

성가복지병원은 가톨릭 서울대교구 산하의 '성가소비녀회'가 운영하는 병원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무료로 운영되는 곳이다.

박 과장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꺼렸다. 인터뷰 중에도 "제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고. 주인공은 이 병원이고

저는 그저 잠시 머물다 가는 사람일 뿐"이라고 했다. 병원장인 이영순 수녀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인터뷰가 중단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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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병원 닫고 시작한 새로운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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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건 과장은 한때 서울 강남에서 '잘나가는 내과의사'였다.

경희대 의대를 졸업하고 지금은 없어진 영동병원에서 내과 과장을 하다가 199111월 개업했다.

다행히 병원은 잘됐다. 하루 80명이 넘는 환자가 찾았다.

2000년 말 그는 병원을 더 키울 욕심으로 건물을 수리하는 공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개인병원을 더 잘해 보려고 시작한 그 인테리어 공사가 그의 인생을 바꿔놓는 계기가 될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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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가복지병원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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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인테리어 공사가 두 달 걸린다고 했다.

마냥 놀 수는 없어서 봉사할 곳을 찾다가 성가복지병원에서 내과 의사를 찾는다는 말을 들었다.

전화를 걸었더니 당장 와달라고 했다. 처음엔 두 달만 봉사하려고 했던 거다.

"그런데 어떻게 두 달 예정이었던 봉사가 '계속 근무'가 됐나.

"봉사 시작한 지 한 달쯤 됐을 때 병원 수녀들이 '계속 맡아주지 않겠느냐'고 했다.

하지만 가난하고 병든 환자를 위해 나의 안락한 삶을 포기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더군다나 그때는 약국을 하던 아버지가 사업에 손을 댔다가 큰 손해를 봐 집마저 날린 상황이었다.

한창 공부에 몰두해야 하는 두 딸은 어떻게 키울 것인지. 쉽게 결론이 나질 않더라."

그래도 최종 결심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을 텐데."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집사람에게 기도를 통해 답을 얻어달라고 했다.

3일 철야기도를 갔다 온 집사람이 말했다.

'의사는 어차피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당신도 그래야 하지 않겠나.

개업의가 돼서 돈 많이 모으고, 먹을 거 다 먹고, 집에 갖출 거 다 갖추고, 아이들 해줄 거 다 해주고

그런 다음에 머리 하얗게 돼서 이제 봉사 좀 해볼까 하는 건 봉사가 아니다.

젊고 힘 있을 때 남을 위해 일을 해야 진짜 봉사다'라고.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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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로 오지 않았으면 누릴 수 있었던 많은 것을 포기했는데 후회하진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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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졌던 것들에 대한 아쉬움은 없다. 가족들의 응원은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딸들이 '아빠가 하는 일에 긍지를 느낀다'고 말해줘 더욱 힘을 얻는다."강남 의사 시절과 비교하면 그의 수입은 10분의 1 이하로 줄었다.

하지만 "이 길이 내 길이란 걸 의심해본 적은 없다"고 했다.노숙인 주치의처음엔 겁나는 일도 많았다.

강남에서 병원 할 때 만났던 환자들과는 너무나 다른 환자들을 봐야 했다.

자신이 세상에서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불쌍한 영혼들은 거칠고 폭력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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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응하기 쉽지 않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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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엔 환자의 70~80% 정도가 노숙인이었다. 그중엔 술에 찌든 알코올중독자들이 많았다.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퍼붓거나 목발을 휘두르며 병원 직원들을 위협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렇다고 그들을 포기할 순 없다.

그들을 받아줄 곳은 우리밖에 없는 것 아닌가.

그들은 사랑에 굶주린 사람들이다. 가족에게 버림받고 자기 자신에게도 버림받은 사람들이다.

"그는 "세상이 좋아진 건지 이젠 환자 중 노숙 알코올중독자가 절반도 되지 않는다"

"요즘은 독거노인, 외국인 노동자, 저소득층 환자들의 비중이 조금 높아졌다"고 말했다.

그에겐 그런 거친 환자들을 다루는 '재주'가 있는 듯했다.

이영순 병원장은 "박 과장이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는 사람에게 '왜 또 술 먹고 왔어.

안 먹었으면 얼마나 좋아. 내일 다시 와서 진료받아. 알았지'

하고 다독이면 금세 순해지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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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환자들의 마음을 여는 비결이라도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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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환자를 다 똑같이 대한다. 잘못하면 야단도 친다.

오랫동안 자주 만나다 보면 야단을 쳐도 진짜 나쁜 마음으로 야단치는 게 아니라는 걸 환자들이 잘 안다.

자신이 환자가 아니라 사람으로 존중받는다는 것을 아는 것 같다.

눈빛과 말투, 손길에서 그런 걸 느끼나 보다. 그들을 만져주고 안아주고 그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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